실체 없는 ‘○○문화거리’의 간판들
– 간판은 있는데, 거리는 없다
오늘은 ‘이름만 거창한 ○○문화거리’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한국 도시 곳곳에는 이런 간판이 있습니다.
“○○문화거리”, “△△예술의 골목”, “OO문화예술특화지구”.
그럴듯한 이름, 화려한 간판.
그런데 그 아래를 지나가 보면,
텅 빈 거리, 닫힌 점포, 낙서투성이 전봇대, 그리고... 침묵.
오늘은 ‘문화’라는 이름을 달았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거리를 찾아가
그 허상의 정체와
그 안에 감춰진 도시의 씁쓸함을 살펴보려 합니다.
그 거리의 첫인상 – 이름은 ‘문화’, 현실은 ‘무덤’
서울 중부권의 한 오래된 시장 옆,
지도 앱에 ‘○○문화의 거리’로 표기된 좁은 골목이 있었습니다.
도착하자마자 눈에 들어온 건
크고 튀는 간판이었습니다.
“○○문화거리 – 사람과 예술이 만나는 공간”
깔끔한 디자인, LED조명까지 설치된 멋진 입구 구조물.
첫인상은 제법 ‘있어 보이는’ 느낌이었습니다.
하지만 한 발 들어서자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빈 점포가 줄줄이 늘어선 채 셔터가 반쯤 내려 있고
간판은 낡아서 글자가 벗겨졌으며
바닥엔 음료수 캔과 쓰레기가 흩어져 있고
그 어디에도 ‘문화’의 흔적은 없었습니다
마치 화려한 포스터를 붙인 빈 극장에 들어선 기분이었습니다.
이름은 왜 붙었는가?
이런 거리에는 대체 왜 ‘문화’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인근 구청의 보도자료와 간단한 취재를 통해
몇 가지 공통된 이유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 ① 도시재생 사업의 일환
노후화된 골목을 재생하기 위해
지자체는 ‘문화’를 테마로 한 거리 조성 사업을 자주 벌입니다.
보통 벽화 그리기, 조형물 설치, 버스킹 무대 조성 등을 포함합니다.
하지만 예산과 인력은 제한적이고,
일회성 이벤트로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 ② 유휴상권 활성화 기대
한때 번성했던 시장이나 골목 상권이 쇠퇴하면,
‘문화거리’라는 간판을 붙여
관광객을 유도하거나 카페거리로 리브랜딩하려는 시도가 많습니다.
하지만 기존 상권과의 충돌, 입주 업주의 무관심,
주차 문제, 접근성 부족 등으로 흐지부지됩니다.
📌 ③ 이름만 바꾼다고 ‘문화’가 생기지 않는다
벽에 벽화를 그리고,
입구에 조형물을 세우고,
표지판 몇 개를 바꾼다고 해서
그곳이 ‘문화거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문화는 사람과 관계와 시간이 쌓여야 생기는 것이니까요.
‘텅 빈 거리’ 속의 기묘한 풍경들
이름만 ‘문화’인 거리들은
때때로 기묘한 풍경을 연출합니다.
🪑 누구도 앉지 않는 디자인 벤치
한쪽에는 예쁜 곡선으로 제작된 벤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먼지가 쌓여 있었고,
그 위엔 누군가 쓴 욕설 낙서만 남아 있었습니다.
‘누구를 위한 벤치였을까?’
그 디자인이 사람보다 예산에 맞춰진 것은 아니었을까?
🎨 지워진 벽화
벽 한켠엔 희미하게 남은 그림이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춤추는 벽화였지만,
절반은 벗겨지고, 위엔 낙서가 겹쳐 있었습니다.
시간은 멈추지 않는데,
관리되지 않는 예술은
시간에 의해 조용히 제거됩니다.
📦 쓰레기와 버려진 포장상자
거리 곳곳엔 쓰레기 봉투, 택배 박스, 폐목재들이 놓여 있었습니다.
오히려 ‘문화’보다는 비정형의 쓰레기 정류장처럼 보였습니다.
간판과 실제 사이의 깊은 간극
‘문화거리’ 간판은 일종의 도시적 약속입니다.
“여긴 재미있고, 다채롭고, 창의적인 일이 벌어지는 공간입니다”라는 선언.
하지만 선언이 실천되지 않으면
그건 오히려 실망의 증표가 됩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문화거리라면서 왜 카페 하나 없어요?”
“이벤트가 있었대서 왔는데, 아무것도 없네요.”
“그냥 간판만 있는 데였어요.”
이런 경험이 반복되면
사람들은 그 이름을 믿지 않게 됩니다.
도시의 언어가 무력해지는 순간입니다.
그 거리의 감정 – 버려진 약속, 혹은 잊힌 실험
그곳에 앉아 한참을 바라봤습니다.
말끔하게 정돈된 초입과는 다르게
점점 안쪽으로 갈수록 지저분하고 조용하고 허무한 공간이 펼쳐졌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거리의 진짜 문화는,
사람 없이도 버텨낸 쓸쓸함일지도 모르겠다.’
이 거리에는
누군가의 기대,
누군가의 발표자료,
누군가의 발표회장용 PPT가
고스란히 쌓여 있었던 거죠.
그것은 실패한 기획이었지만,
동시에 한국 도시의 특징이기도 했습니다.
‘이름 붙이기’는 쉬우나, ‘지속시키기’는 어렵다.
📩 마무리하며: 당신 동네의 ‘이름뿐인 거리’는 어디인가요?
도시는 끊임없이
브랜딩과 포장을 통해
‘새로움’을 말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새로움 속에
정말 사람이 살고 있는지,
그 공간에 정이 깃들고 있는지,
한 번쯤은 돌아봐야 합니다.